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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의 삶은 참 위대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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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제 작성일15-01-24 06:43 조회4,7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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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월만에 가족들이 모여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국제시장' 영화를 관람했다. 

 

아들,딸 다 유학생인데,방학이라 귀국했고, 나는 홈페이지,브로셔어 관계로 16일(금) 올라오다 보니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다고 호들갑 떨일도 없지만, 그래도  영화를 몇 년만에  가족 전체가 보러갔다.

 

국제시장은 흥남 부두 철수 부터, 독일 파견 광부, 간호사, 월남전,남북 이산가족 찾기 등 일련의 한국 역사가 조명되었다. 흥남 철수작전에서 10만 피난민을  구한 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의사이시다). 그리고, 중중간 현대 정주영 회장,앙드레 김,소년 이만기,김동건 아나운서,  1970년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봄, 여름, 가을에는 오후 6시, 겨울에는 오후 5시로 나누어 해가 지기 전 애국가를 방송했는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애국가가 울리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의례가 끝날 때까지 경례를 해야 했는 그런 장면들이 중간 중간 추억을 회상하고, 재미를 더 해줬다.

 

친구 누나가 독일 파견 간호사로 갔었고, 월남전 때 동네 형이 자기 형이 파병 가서  C-RATION (씨레이션)가져왔다고 자랑하던 일,이산가족 찾기에 너도 나도 눈물 콧물을 뺏던 일 들은 다 보고 지내온 터라 많은 공감이 되었고, 감동적인 장면은   눈물 샘을 자극했다.

 

극 중에 오영자(김윤진)가 막내 동생 윤끝순(김슬기)의 결혼 준비 등으로 돈을 벌기 위해 윤덕수(황정민)가 월남으로 가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장 역할을 한  장남으로써 충분히 잘해왔는데, 당신은 동생들을 위해 또 고생과 위험한 지역으로 가느냐?  가지말고 이젠  당신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 라고 절실하게 따지듯이 월남 가는 것을 반대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우리 어머니가 떠 올랐다.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 어머니는 남편보다 집안의 가장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쉬지않고,  일하시면서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렸고,  남편의 홀대(?)랄까(경상도 남자는 돈 버는 가장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데, 본인 수입은 별로이다보니, 어머니가 돈 버는 것에 기죽지 않을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속에서도 굿굿하고 억척같이 살림을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서 김밥,만두를 만들었고, 시장 상인,학교 앞 문방구에 넘겨주는 장사를 하셨다. 아마 대구 시내 남산동 지역이나, 교동 시장에서 우리집 김밥, 만두를 먹은 여학생(지금은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이리라)들도 상당할 것 같다.

 

동생들과 같이 중고등,대학교  다닐때 단무지, 홍당무  썰고,김밥 말고, 만두 빚고 많이들 생활 전선에서 도와 드리기도 했고, 나는 고등학교 때  반장을 했는데, 소풍때면 선생님 도시락 주문을  받아와서   어머니랑 동생들과 같이 열심히 준비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생들도 학교 행사 도시락 주문을 자주 받아와서 이래 저래  우리들도 집안일을 도우면서 자랐다.

 

어릴때부터 어머니는 시장에서 맛있는 과일을 사가지고 와서 우리들을 먹였고, 호박 잎을 쪄서는 밥을 얹고 양념 간장에 올려 삼형제 순서대로 우리들 입에 직접 넣어 주시기도 했는데, 우리들은 병아리 새끼마냥 차례대로 입 벌리고 기다리던 배고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

 

나도 성장하고 회사 취직해서 서울로 가고 그러던 시절에 어머니는 60 연세에 중풍을 맞았고,(올해 80세로,병환이 온지 근 20여년이  되었다) 동생이 김천에서 개인 병원을 개업한터라 어머님을 돌본다고 대구 집을 팔고 김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 뒤로 재활치료도 열심히 받고 했지만, 한번 훼손된 신경은 회복이 되지 않았고, 설상 가상으로 전기료를 아낀다고 밤에 전기불 끄러 가다가 넘어져 다리뼈가 부러졌고, 이후 회복 후 일어 섰으나, 골 다공증이 심하여 다시 뼈가 부러지면서, 다시는 일어 나지 못하고, 앉은뱅이 신세가 되어버렸다. 몇년 전에는 치매 증상까지 와서, 동생이 운영하는 요양 병원으로 부득이 모시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참 기구한 운명인 것 같다.

 

우리가 어릴때부터 줄곧 일만 해오시고, 집안 식구들 먹여 살리고, 이제 자식들이 성장하고 결혼해서 손자,손녀도 보고 은퇴해서 아들 집 놀러 오고 하시며 조금 편안하게 지내시다가 그만 몹쓸 병마를 당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님과  병동은 떨어져서 동생 병원에 계셨는데,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 가신것을 충격이 올까 싶어  말씀드리지 않고 있는데, 아마 오래동안 보이지 않으니 나름 짐작하고 계신것 같기도 하다.

 

영화 상영 내내 어머니의 기구한 삶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의 슬픈 장면이 나오면 저절로 눈물이 나왔고, 자식들 모르게 손수건으로 훔친다고  애먹기도 했다.

 

국제시장의 윤덕수(황정민)의 삶 못지않게, '우리 어머니가 보여준 삶은 참 위대하시다'라고 표현해도 모자랄것 같다.

 

작년 아버님 작고 후, 마음 속으로 아버님께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동생들(우리는 아들만 3형제이고, 내가 장남, 차남은 김천 감문 요양병원 원장, 막내는 현재 나하고 같이 후레쉬팩토리 운영과 자두 농사를 짓고 있다) 하고 같이 열심히 잘 살아 갈께요." 라고 다짐을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님, 어머님 사진을 보면서, 다시금  다짐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 생일 날 저녁에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중환자실로 옮겼고, 그리고는 다음 날 운명하셨기 때문에, 불교식으로는 살아 계신 날을 기준으로 제사 날을 한다고 해서, 금년부터 내 생일은 찾아 먹지 않고, 이 날은 파란 만장했던 아버님의 삶을 회상하는 날로 할려고 한다.  앞으로 남은 평생 내 생일은 없고, 아버님  제사날이자 또한, 이날은 더욱 아버님을 추억하는  뜻깊은 날인것이다.

 

윤덕수(황정민)가 살았던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어머니를 통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들까지도 열심이 사셨던 분들을 따라가고 있다.

 

요즘의  나는, 어머니가 살아오셨던 가족을  이끄는  책임감, 아버지와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 부지런함, 신용, 진실성,약속 지키기,성실하고, 포기없이  억척같아 살아가셨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그 길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따라가고자 힘쓰고, 또한 모방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배우고, 일하면서 성장한 세대이지 않은가?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식들 걱정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잡숫고,  불편한 몸이더라도 이젠 당신의 삶을 누리면서 사세요~~

 

사랑합니다^^ 

 


<후레쉬팩토리 '붓 가는대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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