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악처’의 대명사로 소크라테스 부인을 입에 올린다. 진짜 악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악처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가정적인 ‘부정적 요소’를 불편으로 여기지 않고 승화시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류의 대사상가가 탄생하는데 ‘악처’도 그 어느 것에 못지않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악처’에 대한 문제해결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혼하고 새로운 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좋은 마누라’가 올 것이라는 확실성이 없다. 살아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악처’를 교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그렇치 이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인류의 대 교육가라는 소크라테스 마저도 그것에 실패한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새 마누라를 얻을 수도 없고 기존 마누라 성격을 바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악처에 대한 두 해결책이라는 것이 모두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기이익을 위한 것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도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승하는 차라리 ‘나를 바꾸라’고 하셨다. 즉 내 마음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마음이 변하면 인생이 변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대상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모든게 다르게 보인다. 컵에 물이 반 정도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반 밖에 안 남았네’ 라고 하지만 ‘아직 반이나 남아있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더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건 체념이 아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음 절집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박노자 교수의 〈하화중생이 없는 한국 선〉가운데 서두의 ‘시간 강사’편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물론 대학의 ‘부패’한 기존체제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럴 힘과 능력이 없으면 그 시간강사처럼 자기의 마음과 사고를 ‘마음공부’를 통해서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건 도피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이다. 연꽃을 흙탕물 속에서 피워내는 일이다. 그건 종교의 고유기능이기도 하다.
교수님의 글을 앞으로도 계속 조금씩 분할하여 논리적 맹점이 있거나 부분적 사실을 전체로 여긴 곳을 하나씩 지적해 가고자 한다. 무슨 말이던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논객들이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는 ‘자기가 인식한 틀’일 뿐이지 그것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진단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내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라는 한계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그 글을 반박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대상(제도 포함)을 바꿀 수 있다면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체제 포함)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기쁜마음으로 나를 바꾸어라. 그러면 상대방과 이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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