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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구기동 행 버스는 여러 노선이 있다. 시내에서 창의문을 넘는 코스, 불광동에서 구기터널을 지나는 코스, 정릉 방향에서 북악터널을 지나는 코스(이야기가 있는 길 4회 참조) 등. 오늘은 02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이북오도청 앞에서 내린다.
이북오도청(以北五道廳). 말만 들어도 낯설고 아득한 역사의 유물처럼 들린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에게는 ‘저런 조직도 있었나?’ 하는 의구심, ‘저런 것이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들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지리 시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도가 이북오도인데 거기에 더해서 아직 수복하지 못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를 포함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 이북오도청이다.
그러면 이북오도청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실향민들의 연락처?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온다면 누가 무슨 일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담당 부서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느 날 친구들과 한담(閑談)삼아 이야기해 본 적이 있다. 갑자기 북쪽이 붕괴한다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될 것인가? 의견은 분분했으나 결론은 아주 복잡할 것이라는 데로 귀결되었다.
굳이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국사 과목조차 선택과목으로 바뀐 상황이니, 젊은이들은 단절된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다.
중국과 주변 국가(민족)의 근세사를 보면 중국은 이른바 서남공정(西南工程: 중국의 서남쪽에 대한 역사 침략)에 이어 티베트를 병합했고, 서북공정(西北工程)에 이어 신장 위구르를 확실히 자신의 통치권 안에 두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못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십 수 년 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부 역사로 격하(格下)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 변방(邊方)의 역사라는 것이다. 북한과는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투자했지, 역사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가지…. 이북오도청 앞을 지나며 머리가 복잡하다.
길은 아스팔트길로 이어져 비봉길로 올라가고 있다. 청운양로원을 지나고 잘 지어진 담 높은 집들을 지나면 좌측으로 연화사(蓮花寺)가 나타난다. 옛 어머니들 말씀에 초파일에 절을 세 곳 다니면 복덕(福德)을 가득 받는다 하셨으니 오늘 답사는 세 절을 다녀 복덕 받아 보리라 마음먹고 연화사부터 들른다.
연화사 위로는 국립공원 비봉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이제부터는 차는 다닐 수 없는 산길이며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대표적 등산 코스다. 잠시 산길 오르막을 지나면 왼쪽으로 고즈넉한 절 금선사(金仙寺)가 길손을 맞는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금선암(金仙庵)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 지도에 오를 정도면 상당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절일 것이다. 기록은 분명하지 않고 태조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은 서남공정 뒤 티베트를, 서북공정 뒤 위구르를 영역 안에 넣었는데, 동북공정의 앞날은 도대체 어찌 되려나…
금선사 입구에 이르면 목정굴(木精窟)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목정굴이 궁금해 그곳으로 향한다. 계곡길 사이로 오르면 큰 바위 사이에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 곳에 불당을 꾸미고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이곳은 조선 23대왕 순조의 탄생 전설이 전해지는 ‘전설의 고향’이다.
때는 조선 22대 왕이면서 세종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聖君) 정조 연간의 일이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에는 고승 용파(龍波)대사가 있었다. 조선이 유교 국가이다 보니 승려의 신분은 천민으로 떨어지고 사찰에는 사대부와 유생들의 패악이 그 도를 넘고 있었다.
이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용파 대사는 과감히 그 패악을 알리려고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임금을 알현할 기회를 얻을 수 없어 물장사를 하면서 3년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파계사로 돌아가기로 하고 숭례문 근처 여사(旅舍)에 들어 마지막 밤을 지내고 있었다.
이 날 정조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숭례문께 여사에서 찬란한 빛이 퍼져 나가는 꿈을 꾸었다. 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그 곳으로 가게 하였고 대사는 꿈에도 원하던 임금을 알현하고 자초지종을 아뢰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대사의 요청을 들어 주었고, 그 도력 깊음을 알고 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정조는 춘추 30이 넘도록 아들을 보지 못했다. 정비(正妃) 효의왕후(孝懿王后)는 인품이나 효행이 출중한 분이었으나 자식이 하나도 없었고, 의빈(宜嬪)성씨에게서 얻은 문효세자(文孝世子)는 5살 어린 나이에 요절해 효창원(孝昌園: 지금의 효창공원)에 묻히니 이후로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에 용파대사에게 아들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다 한다. 용파는 자신보다 도력이 뛰어난 삼각산 금선암의 농산(聾山)대사를 천거한 후 자신은 수락산 내원암(內院庵)으로 가 두 대사가 함께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라 안의 모든 영혼들을 살펴보았으나 세자 될 만한 인물이 없기에 용파는 농산대사에게 몸 바꾸어 정조의 세자로 태어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3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대사는 목정굴에서 열반하고 정조는 수빈(綬嬪)박씨 몸에서 세자를 얻으니 이 이가 바로 조선 23대 임금 순조라고 한다. 그날이 경술년 6월18일이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질 뿐 정조실록이나 순조실록에 두 대사의 이름이 없는 점으로 볼 때 금선암, 내원암, 파계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는 절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에 따라 세자 낳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있었기에 생겨난 이야기인 것 같다.
수빈박씨에게서 비롯된 지명이 있기에 잠시 짚어 보고자 한다. 수빈박씨가 운명한 후 동대문 밖 배봉산 자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휘경원(徽慶園)이라 했다. 지금의 휘경동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휘경원은 철종 때 두 번의 천장(遷葬; 묘를 옮김)을 거쳐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했다.
목정굴에는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이 정좌하고 계신다. 불자라면 이 정도의 전설을 지닌 곳에서 관음기도라도 드려 볼 일이다. 특히나 자식 보기를 원하는 부부라면 배낭 메고 지나는 길에 들러 보기를 권한다.
목정굴에는 미로처럼 나가는 길이 있다. 온 길로 나가지 말고 굴 왼쪽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가면 구불구불 돌층계가 있다. 이 층계를 통해 오르는 곳이 금선사 절마당 끝이다. 절은 잘 가꾸어 놓아 매우 아담하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1887년(고종 24년)에 모신 신중탱화(神衆幀畵, 서울 지방문화제 161호)가 있다.
전각은 석가여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봉안한 반야전(般若殿)이 아담하고, 여느 절처럼 독성, 칠성, 산신을 봉안한 삼성각이 있다. 절문을 나서니 동자상 같은 두 석상이 안녕을 고한다. 한 석상은 문수보살 같기도 한데 분명하지는 않다.
이제 본격 산행 길로 들어선다. 제법 바윗돌도 자주 나오고 소나무도 싱그럽다. 눈을 들어 앞을 올려보면 비봉과 향로봉이 눈을 마주친다. 금선사를 출발해 10여 분, 한 고비를 넘고 본격적으로 올려치려는 순간 왼편으로 무너진 축대가 보이고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늘의 답사 길은 비봉능선이 아니니 여기에서 좌향좌 한다. 절터가 나타난다. 포금정사터다. 포금정사는 북한산이 국립공원이 됐으며 아담한 절터가 남았다. 남아 있는 몇 개의 주춧돌로 볼 때 포금정사 이전에 제법 규모를 갖춘 절의 유허(遺墟)로 짐작된다.
층계를 오르면 다시 평평한 땅이 나타나고 이곳에 샘물이 있다. 음용불가 표지가 붙어 있으니 마시기 전에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곳을 어떤 이는 고려 때의 향림사(香林寺) 터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하지만 향림사는 불광동에서 오르다 보면 향림담(香林潭) 좌측 높은 평지가 거의 확실시되니 이곳을 향림사 터로 비정(比定)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30이 넘도록 아들을 못본 정조를 위해 용파대사가 신통력으로 세자를 잉태시켰다는 전설의 목정굴에서 기도 드려보심이…
포금정사 터를 지나 서남쪽 하산 길로 가면 드디어 성벽이 나타난다. 이른바 탕춘대성(蕩春臺城)이다. 국립공원 지도를 포함한 모든 자료가 이 봉우리를 향로봉(香爐峰)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사실은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도 모르게 생겨난 이름이 향로봉이다. 아마도 금강산 향로봉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향로봉이 있으니 뜻 없이 향로봉이 된 듯하다. 고려 때나 조선시대에 이 봉우리 이름은 ‘향림사 후봉(香林寺 後峰)’이었다.
승려 성능(聖能)의 ‘북한지’에 따르면 숙종은 성을 쌓기 위해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 어영대장 김석연(金錫衍)으로 하여금 산세를 살펴보게 했는데, 이기하의 보고에 이렇게 적혀 있다. “문수봉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달려 칠성봉이 되고, 칠성은 두 줄기가 떨어지는데 나한, 증봉, 혈망, 의상 여러 봉이 되어 중흥동 수구에 이르고, 한 줄기는 서(西)로 달려 승가봉, 향림사 후봉이 됩니다.(自文殊峰一枝轉西 爲七星峰 七星出兩枝落 爲羅漢甑峰穴望義相諸峰 至重興水口 一枝西走 爲僧迦峰 香林寺後峰)” 향림사의 뒤쪽 봉우리라서 ‘향림사 후봉’이었던 것이 어느 날 슬그머니 향로봉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제 탕춘대성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필자가 어느 날 이 길을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등산객이 한 팀을 이뤄 걷고 있었다. 그 일행 중 어느 아주머니가 산행대장에게 이 성이 뭐냐고 묻자 산행대장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왈, “북한산성입니다.”
필자가 설명을 해 주고 싶었으나 그 산행대장 체면을 생각해 꿍꿍 참았는데, 그 여성은 아직도 그릇되게 알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필자가 친지들과 여러 번 이 성길을 걸으면서 이 성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 성에 대해 상식이 거의 없었다.
우선 탕춘대성이라는 이름부터 살펴보자. 탕춘대(蕩春臺)는 봄을 호탕하게 즐긴다는 뜻으로 연산군 시절 세검정 옆 고지대에 세운 잔치용 전각이었다. 탕춘대성의 본이름은 서성(西城)인데 탕춘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탕춘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성을 알기 위해서는 숙종의 서울 방어 계획부터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의견 차이로 37년간이나 북한산성 축성(築城:성 쌓는 일)을 갑론을박 하고도 결론이 없자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의 변(辯)이 얼마나 멋진지 북한지를 읽으면서 필자는 기분이 상쾌했다.
“마치 사람 얼굴이 다르듯 만약 모든 의견이 같아지기를 기다린 연후 일을 한다면 일 될 날이 없다(如人面之不同 若必待諸議俱同 然後作事則事無可成之日)”
이래서 37년을 논의하고 불과 9개월 만에 북한산성을 쌓았다(1711년). 그런 후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 만일의 사태에는 서울도성 대부분의 백성을 이곳으로 옮겨 항전의 자세로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37년 갑론을박을 물리치고 9개월만에 숙종은 북한산성을 뚝딱 쌓아 올리고 연산군은 호탕하게 즐길 탕춘대 만드니…
임진란, 병자호란 때 임금은 모두 도성을 버리고 몽진(蒙塵: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쌓은 성(城)이 조지서 동구(造紙署洞口: 조지서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앞인데, 그 동네 입구라는 뜻)를 막은 탕춘대성이었다. 탕춘대성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구기터널 위도 지나고, 암문도 만나고, 상명대학교 담을 좌측으로 끼면서 내려가 이윽고 홍제천에 닿는다.
여기서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유명한 옥천암으로 향한다. 옥천암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은데 유형문화재 17호인 고려시대 마애관음을 볼 때 적어도 고려 때 절임을 알 수 있다.
호분(胡粉)을 희게 칠한 마애관음은, 근세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필수 탐방 장소나 되는 듯, 화이트 부다(White Buddha)라는 이름으로 자주 거론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씨가 고종의 천복(天福)을 이곳에서 빌었다고 한다. 1868년에는 명성황후의 시주로 관음전이 건립되기도 했으니 왕실과 가까운 절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신통력도 만만치 않아 신도읍에 살던 나무꾼 윤덕삼은 백불에게 기도해 만년 총각을 면했다고 하고, 임진란 때 왜병들은 이 백불을 조선군으로 오인해 탄환을 모두 소진하는 바람에 권율 장군에게 대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하나 옥천암의 특이한 점은 수덕전(脩德殿)이다. 절집 전각 이름과는 느낌이 다른 데다가 닦을 수(修) 대신 육포 수(脩)를 쓴 것도 특이하다. 수(修)와 수(脩)는 같이 쓸 수 있는 글자이기에 가능했다. 또 이 전각에는 석가모니불, 신중단, 지장단, 칠성단, 산신단, 독성단이 모두 갖춰져 한 건물에서 모든 전각의 기능을 해결한다.
날도 저물어 가기에 차(茶) 한 잔 신세지고, 탕춘대성의 정문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午間水門)을 만나러 간다. 홍지문은 일명 한북문(漢北門)이다. 오늘 답사 길은 여기에서 접는다. 참고로, 상명대 오르는 길 좌측에(홍지동 40번지) 춘원 이광수 선생 고택이 있고, 세검정 3거리에서 시내 쪽으로 석파랑(石坡廊)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 안에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 별당(서울 유형문화재 23호)이 있다.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하차. 버스 0212 환승해 이북오도청에서 하차(0212번은 옥수에서 출발). 또는 구기동행 버스로 구기동 입구에서 하차. 걷기 코스 구기동 ~ 이북오도청 ~ 연화사 ~ 금선사 ~ 포금정사터 ~ 탕춘대성 ~ 옥천암 ~ 홍지문/오간수문 ~ (이광수 고택/석파정)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주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글·이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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