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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백은 단순히 철을 잊은 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여기 있다" 속삭이는 듯 매서운 바람과 살을 에는 한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피멍 든 듯 붉은 꽃잎을 조심스레 펼친다. 모두가 움츠린 겨울, 동백은 오히려 조용한 힘을 품어낸다. 그 꽃 앞에서 나는 오래전 청춘의 한때를 떠올린다.
1960년대 중반.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소구권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낮에는 전업사에서 전기기기 수선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 모자라 늘 허기가 졌고 수면 시간이 부족해 밤에 등교해 책상에 앉으면 잠이 쏟아져 늘 졸린 눈을 비벼야 했다. 겨우 도시락은 꽁보리밥으로 꾹꾹 눌러 담았지만 아침 끼니는 거르기가 일쑤여서, 퇴근과 등교 사이엔 한국대부금융협회 고픈 배를 안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때, 거리의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이미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가슴을 콕 찌르듯 박히던 노랫말. 그것은 배고픔보다 더 깊은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던 선율이었다. 막차를 놓쳐 별내 유승한내들 어두운 길을 걸을 때면, 하늘 위의 둥근달은 낭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호떡처럼 마음껏 먹고 싶던 소년의 간절한 바람이 투영된, 절절한 달빛이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새 그 시절은 멀리 뒤로 물러났지만, 졸업식 풍경을 뉴스에서 볼 때면 여전히 가슴은 뭉클했다. 꽃다발보다 눈물이 더 많은 졸업식. 울음을 참지 못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곧 내 지난 신탁대출 날의 거울 같았다. 새벽마다 공장 기계 앞에 서고, 밤이면 교복을 꺼내 입으며, 빈속을 달래가며 책상 앞에 앉았던 시간들. 그 수고 끝에 손에 쥔 한 장의 졸업장은 얼마나 값지고 절절했던가.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고비가 있었고, 때론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을 무직자빌라담보대출 떠올렸다. 계절을 탓하지 않고 고요히 견디며 꽃을 피워내는 동백처럼, 내 삶 또한 버텨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지난해는 나라 안팎의 사건·사고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얼룩졌다. 정의를 말하던 이들이 탐욕에 빠지고, 성실한 사람들이 좌절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추운 계절에도 동백이 피어나듯, 세상 어딘가에는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동백 앞에 선다. 차가운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난 꽃. 그 붉은 꽃잎을 바라보며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 또한 계절을 탓하지 않고, 외로워도 꿋꿋하게 살아가리라.
'동백아가씨'는 내 청춘의 상처를 달래준 노래이자, 나를 지탱해준 친구였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꿋꿋한 겨울꽃으로 피어나고 있으리라 믿는다.
/강수찬(수필가·한국전기기술인협회경남도회고문)